이진송 저자는 이대에서 여성학을 복수전공한 칼럼니스트다. 대학생 시절 이대 친구들이 '여성학 수업에서~' 라며 이야기를 해주는 것에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여성학에 대해 이렇게 구체적이고 심도있게 가르치는 대학은 이대가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젠더갈등이 여전히 심하다고 느끼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젠더와 관련된 주제는 참 민감하게 다뤄야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바로 목차였다. 목차만 읽어도 마음이 위로받는 느낌. 얼마나 많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해야되는 것들'에 억눌려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남자란 이래야 한다, 여자란 이래야 한다 라는 식의 꽉 막힌 사고방식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십수년도 전부터 들려왔던 것 같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연애하지 않아도, 결혼하지 않아도, 출산하지 않아도, 아이보다 내 삶을 더 중시해도, 내면의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어도, 방긋방긋 웃지 않아도, 나이가 어리지 않아도, 모성애가 없어도, 여리여리하지 않아도, 여자여자하지 않아도, 순결하지 않아도, 우아하지 않아도, 싹싹하지 않아도, 아담하지 않아도, 자연미인이 아니어도, 잘 먹으면서 날씬하지 않아도, 화장을 하지 않아도, 가슴이 예쁘지 않아도, 긴 생머리 그녀가 아니어도, 오빠라 부르지 않아도, 골드미스 혹은 알파걸이 아니어도, 꼭 ‘오빠들’을 사랑하지 않아도, 가족을 용서하지 않아도, 살림 밑천이 아니어도, 사랑스러운 딸이 아니어도, 친구 같은 딸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마음이 뻥 뚫리는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책 초반부터 우리 사회가 여자들에게 들이대는 ‘여성’의 틀을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라는 강도에 빗댄 것도 인상적이다. 침대 크기에 맞지 않으면 몸을 늘리거나 잘라내며 행인을 잔인하게 죽이던 강도이야기. 위의 목차에 열거된 특징들을 갖지 못하면 '여자가 왜 저래' 라는 시선이 돌아오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
예전에는 남자애들보다 우수한 알파걸이 되라고 부추겼다면 이제는 유능하더라도 남자들의 기를 죽이면 안 된다는 옵션이 붙는다.
어차피 가부장제 하에서는 ‘너무’ 연애하는 여자나, 연애하지 않는 여자가 결만 다를 뿐 같은 보복과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연애를 너무 많이 하면 헤프고 가볍다는 시선이 오고, 연애를 아예 하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있느냐, 너가 눈이 너무 높은건 아니냐 하며 자꾸만 교정하려 드는 시선들.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고. 남의 연애에 관심이 참 많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여자는 결국 연애와 결혼을 통해 사랑 받는 여자친구나 아내,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것은 여자들의 선택이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제한하고 원하는 틀에 우겨넣는 전략이다.
가사 노동, 청소 노동, 직장 통근, 자기계발, 스펙 쌓기, 회식 자리 참여 등 경제 활동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모든 무고용, 무급 활동이 그림자 노동에 속한다.
취업에서 성차별이 횡행하고 특히 고용이 불안정한 현실이 비혼 여성에게 결혼을 강요한다. 그러나 더 이상 결혼은 여성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 아니다. 결혼의 기능적 요소들은 자신이 가진 경제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
남성에게 결혼은 성인으로서의 통과의례이자, 경력에 덧셈인 선택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결혼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거래이다. 그러니 여성의 궁극적인 행복과 로망이 결혼과 안정 그리고 웨딩드레스라는 망상 좀 때려치우자. 이제는 이 편협한 제도를 뜯어고칠 시간이다.
여성은 출산 기계가 아니고, 임신할 수 있는 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임신과 출산을 할 필요는 없다.
산모가 임신을 함으로써 걸릴 수 있는 질병, 출산 과정에서 처하는 위험한 상황들이 많아도 너무 많단다.
뉴스에서는 임신중절을 강요받은 여성들보다 불균형한 성비 때문에 남자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못하거나, 여자 짝꿍이 없는 것을 걱정했다.
와 나 이거 기억나. 초등학교 때 수업시간이었다. "지금은 남자랑 여자 짝꿍이 잘 맞지만 나중에는 혼자 앉는 남자애가 많아질거야"라며 성비가 변하고 있는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시던 장면. 여자애들이 임신중절로 사라져간 현실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왜 항상 여자들만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중시해야 할까? 겉모습에 조금이라도 연연했다가는 지옥문이 열리고 만다. 조건을 따졌다가는 ‘김치녀’로 불리고, 얼굴을 중시하면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얼간이 취급당한다 ...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명제는 너무 뻔하고 진부하다. 그리고 이 도덕적 가르침은 여성에게만 향한다.
'얼빠'라는 단어는 여성들에게만 통용되는 단어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찾는건 당연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남자한테 얼빠라는 말을 쓴 적이 있던가? 이상형을 이야기 할 때 '얼굴이 잘생긴 사람'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여성은 뭇매를 맞는다. "얼굴 잘생긴 남자... 쉽지 않네." 부터 시작해서 "너 얼빠야? ㅋㅋㅋ" 라는 말. "잘생긴 애들은 얼굴값 해" 하면서 설득하려는 말. 성별에 따른 연령별 이상형 통계를 우스갯소리처럼 개그의 소재로 써먹던 게 기억난다. 10대도 예쁜 여자, 20대도 예쁜 여자... 60대도 예쁜 여자. 외모 보는게 뭐가 어때서? 자기들도 다 보면서. 하지만 그 기저에는, 재력의 차이에 대한 암묵적인 전제와 추후 출산과 육아를 위해 경력이 단절될 것이라는 전제가 모두 포함된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진다.
타인에게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내면을 발견하고 사랑해달라고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더군다나 여성은 굳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선구안을 기를 필요도, 모든 조건을 제치고 그것을 최우선 가치로 여겨 사랑할 의무도 없다.
남자들만 있어서 칙칙하다면서 여성의 존재를 추어올릴 때, 여성은 화사한 분위기 메이커라는 전제가 깔린다.
이전 직장에서 여자 선배들은, 내가 아닌 것을 일부러 그런 척 할 필요가 없다며 나를 토닥여주시고는 했다. 그 마음이 나를 안심하게 했고, 지탱해주었다. 나도 그런 멋진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긋방긋 웃는 것, 과다하게 맞장구치는 것,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드는 것 등은 여성으로 태어난 순간 자연스럽게 딸려오는 옵션이 아니다. 맡겨 놓은 양 요구하지 말고 없다고 질척거리지 말자.
여성이 방긋방긋 웃지 않아서 분위기가 처지고 일할 맛이 안 난다면, 그냥 그 사람이 무능하다는 증거일 뿐이다. 웃지 않는 여성의 잘못이 아니라.
나이든 여성을 기다리고 있는 라벨은 멸시하고 싶은 ‘아줌마’ 혹은 숭배하고 싶은 ‘어머니’ 혹은 무성적 존재인 ‘할머니’뿐이다. 어린 육체만이 여성의 가치이자 여성 그 자체로 여겨졌다.
어린 여자는 비싸거나 좋은 것을 알아보는 안목이 없으니 가성비 여친이라는 말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퍼진다
순결은 성별화된 가치이고 언제나 여성에게만 배당된다. 그리고 잃거나 빼앗기거나 지키는 구도로만 작동한다.
현대의 여성이라면 성적으로 개방적이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개방되어 있으면 문제가 된다. 굉장히 기만적이다. 남자가 원할때는 줘야 하지만 스스로 원하거나 남에게도 주는 여자는 순결하지 않은, 더러운, 문란한, 너무 쉬운, 싼, 걸레가 된다.
키 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관대한 취향이지만, 키 큰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속물이다.
상대 여성이 자신보다 키가 커서 기가 죽는다면 여자에게 낮은 신발을 신으라거나 키가 크다고 툴툴거리는게 아니라 그냥 기죽은채로 살자.
10대들은 화장하면 비난받는 동시에, 화장을 하지 않은 성인 여성들이 겪는 멸시도 비슷한 수준으로 경험한다.
가슴은 완전히 성애화되어서 온전히 여성의 것일 수 없는 비운의 기관이다.
머리길이는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옷처럼 유동적인 어떤 형식일 뿐인데, 이것으로 성별을 판단하고 특정 성별의 외양을 규정한다니 참 웃긴 일이다.
울거나 아양부리는 것은 무기가 아니다. 상대의 배려와 호의가 있어야만 유효한 이 방법은 철저히 약자만 연마하고 구사하는 기술이다.
연장자 남성과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생활이 산뜻하고 보송보송해지는데.
남성보다 우수한 여성은 특별한 존재로 범주화하고 ‘알파걸’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여성보다 우수한 남성은 특별하지 않다.
취집한다는 말에는 일하지 않는 여성이 남성에게 의탁한다는 멸시와, 그럼에도 그것이 잘 간 시집이라는 선망이 이중으로 깔려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경제적 독립을 가능케 하는 직업은 시대불문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이것은 저출생 현상에 대처하는 정부의 음모다. 육아의 달콤한 부분만 쏙쏙 빼서 부각하고, 그것이 얼마나 특수하고 지난한 육체적, 감정적 노동인지 은폐하는. 노키즈존이 창궐하고 ‘맘충’이라는 라벨링으로 아이 키우는 여성을 짓누르는 사회에서 적당히 귀여운 남의 아기는 힐링 이미지로 잘도 팔아제낀다.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어린이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참 귀하다. 가끔 산책하다가 어느 아파트 단지에나 들어가야 간신히 볼 수 있는 아이들. 몇 년 전부터 슈돌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육아 프로그램이 창궐했다. 삼둥이를 꽤나 좋아했던 나로써는 아기를 낳으면 정말 저렇게 예쁘고 귀여운 모습만 볼 수 있을까 하며 기대감에 부풀기도 했다. 근데 정말로, 보다 보면 저출산에 대한 정부의 음모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현실은 안 저렇잖아요. 평일에도 여유를 내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연예계 종사자들(돈 많은)이나 저렇게 예쁘게 아기를 키울 수 있지, 현실은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했다.
나만해도, 내 친구들 중 나의 엄마 같은 성격이나 스타일은 단 한 명도 없다. 내게 엄마는 ‘사랑하지만 나랑은 별로 맞지는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친구 같은 딸은 엄마의 고통이나 감정에 공감하고 분담하는 역할을 맡는다.
친구는 동등한 관계에서나 가능하다. 친구 같다는 말은 친구는 아니라는 뜻이고, 양육자이자 성인인 엄마는 아동 혹은 청소년인 딸과 친구가 될 수 없다.
엄마가 결혼생활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호소할수록 딸은 엄마의 불행을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결혼 제도나, 동반자인 남편/아빠에게서 기인한 고통을 딸이 짊어지는 셈이다.
친구 같지 않으면 어떤가? 친구는 알아서 사귀는 거지, 낳아서 만드는 게 아닌데.
흥미롭다. 평소에 가끔씩 고구마를 100개 먹은 것처럼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이유들을 이 책에서 속 시원하게 말로 꺼내준다. 동시에, 남자인 사람들 앞에서 비스무리한 주제가 나오면 '너 좀 예민하다'느니 '너 페미니스트냐'느니 하면서 반박하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와 관련된 주제가 재미있고 흥미로운건 사실이다. 근데 이게, 세뇌된 것이 아니라 일상처럼 자라온 환경이 이랬어서 놀랍지는 않다. 주변에 그런 것 때문에 고통받고 체념하고 분노하는 여성들을 봐왔어서. 그래서 더 공감이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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