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2013년에 창기장편소설상을 받은 <이만큼 가까이>를 소개한다. 책이 참 잔잔하다. 주인공과 함께 어릴 적 추억을 더듬더듬 따라가보게 만드는 책이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학생 시절에 대해 회고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게 됐다. 책 중간쯤 대단한 반전 포인트가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크게 연관성 없어보이는 산발적인 에피소드들에 마치 한국판 <프렌즈>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경기도 파주시에서 자란 주인공과 친구들의 성장기를 다룬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경기도를 주제로 했다는 면에서, 최근 핫했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삼남매가 떠오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정세랑 작가의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고 있다. 아는 동생에게 선물받았던 <피프티 피플>을 시작으로 흥미를 느껴 <목소리를 드릴게요>,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까지 읽었는데 각기 다른 특색을 갖고 있어 몰입도가 상당하다. <보건교사 안은영>,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와 같이 상상력이 가미된 SF소재의 작품도 있지만, 이 책 <이만큼 가까이>, <피프티 피플>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그들만의 사연을 깊게 파고들어 인류애를 회복시켜주는 책들도 있다. 개인적으로 후자가 너무 좋다 :)
인상깊은 문장들 & 감상
안온하고 좁은 세계에서 성장은 유예되고 만다.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랑할 필요는 없어. 하나도 안 사랑해도 돼." P.30
가족은 소유물이 아니고, 각자 다른 성격과 생각을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고, 수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가족 간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친구 수미는 망나니 삼촌과 폭행을 일삼는 할머니 밑에서 자라고 있었고, 폭력적인 환경 속에서 친구에게 들은 저 한 마디는 그녀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송이 : 왜 기분이 염소 같아?
주연 : 다들 착한 양처럼 순하고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데 나만 그 사이에 낀 염소처럼 고집을 부리고 이것저것 결정하려 들어. P.45
기분이 염소같다니. 이런 신박한 표현을 봤나 ㅋㅋㅋㅋ
주완이는 일주일 단위로 영화를 봤다. 감독별, 배우별, 나라별, 시리즈별, 테마별, 시대별, 장르별, 원작별로 그때 그때 묶어 스케줄을 짰다. P.62
MBTI 자랑스러운 P형으로서 이렇게 스케줄 짜서 영화본 적은 없는데 한 번 시도해보고 싶어서 찜콩한 문장이다 ㅎㅎ 한 주 잡아서 쿠엔틴 타란티노 정주행해야지..!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가. 꾸역꾸역 나쁜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뭐가 되나? 아니다 싶으면 아니다 하는 게 건강한 거 아냐? P.83
좋은 어른은 좀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나쁜 어른은 내세울 권위가 없다. 그러니 원활히 작동하는 권위란 건 좀처럼 목격하기 어렵고 그런 의심으로 나는 어른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P.104
자칫 잘못하면 인생이란 거 아주 쉽게 비루해지는구나. 여자애들은 두려워하며 자란다. 아주 작은 신호에도 과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피하고 싶은 인생이 순식간에 덮쳐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P.110
중독되는 뇌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무언가에 중독된다면, 그건 중독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이다. P.149
“시다가 뭐 어때서? 허허벌판에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서로가 서로를 보조하는 거지. 웃기네, 진짜. 웬만한 직업은 다 시다야.” P.154
송이는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쉽게 말을 거는 도시 분위기가 싫지는 않았다. P.168
나는 송이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서 두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태어나서 맨 처음 두각을 나타내는 일이 당시에는 아주 사소해 보이더라도 결국 정말로 잘하는 일일 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계화란 친구들이 지구 여기저기로 흩어져버리는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P.169
간단하게 이혼을 하고, 외국인과 결혼하고, 이민을 가고, 나이에 상관없는 머리를 하고, 쨍한 옷을 입었다. 그런데 여기는 그런 약간의 파격에 항상 수군거림이 따라붙었다. 두발단속을 하고 형광 운동화를 신지 못하게 했던 교문 앞 학생주임이 평생 끈질기게 시비를 걸어왔다. 무시하고 살려면 또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테지만 더 재미있고 다양하고 풍부한 곳이 있는데 뭐하러? 여기가 싫어. 두마디로 정리하고는 잘도 떠나갔다. P.170
<이만큼 가까이>에는 주인공의 친구 중 2명이 훌쩍 다른 나라로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쉽게. 나도 그렇게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하게, 심플하게.
“이직도 당장 돌봐야 할 사람이 없는, 아픈 가족이 없는, 부모가 자식보단 부자인 나 같은 애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데, 그런 건 변하잖아. 대개는 아파지고 가난해지잖아.” P.185
서러운 말이지만 확실히 혼자일때 직장을 옮기거나 이사를 가는 것이 훨씬 수월한 것 같기는 하다. 많은 것 고려할 필요 없이 그냥 내 상태만 따져서 이동해버리면 되니까.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런 편의점을 포기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요즘 휴대전화 게임이 죄다 재미가 없게 느껴지는데, 그럼 게임이 재미가 없는 걸까, 사실은 사는 게 재미가 없는 걸까. P.193
남자들도 굴절 속에 있다고 생각해. 강철처럼 두드리면 더 단단한 남자, 그놈의 사나이가 될 거라 강요하는데 강철인 남자랑 세라믹인 남자랑은 다르니까. 두드리면 깨지는 남자도 얼마든지 있는 거 아냐? 나약한 게 아니라 아예 종류가 다른 건데. P.235
서울은 멀리서 보면 세계의 파주 비슷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빛나는 도시에 꽤 가까우면서도 어찌해도 메인 무대는 아닌 어정쩡한 땅 말이다. P.242
내 돈으로 내가 배우고 올거야. 자극을 계속 받아야 고갈이 안 되는 걸 몰라. 근시안들. 그깟 놈들한테 소모당하지 않을거야. -런던으로 떠나기 전 송이 P.268
내 생각에, 별로 좋은 나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 어릴 때는 언제 어디에 있고 싶어도 결정권이 없고, 나이가 들면 지금이 언제인지 어디에 있는지 파악을 못하니까. P.284
줄창 하다보면 뭔가로 연결돼. 놓치거나 떨구지 말고 하다보면 하는 사람도 모르게 뭐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의미 없는 패스는 없다고. P.296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서로 연관이 없어보이더라도, 언젠가는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그림이 된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만원 버스를 타고 먼 거리에 있는 학교에 등하교 하던 추억, 짝사랑하던 남자애가 다른 여자애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느껴지던 배신감과 서러움, 크리스마스 때마다 친구들 집에 번갈아가며 놀러가서 각자 좋아하는 쿠키와 케이크와 클램차우더를만들어먹으며 수다를 떨던 기억, 그 작고 자잘하고 지금은 잊혀질듯 가물가물한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소중한 기억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
<이만큼 가까이>라는 책 제목처럼 어릴 적부터 쭉 함께해온 친구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가깝게, 많은 시간 변해가는 서로의 모습을 목격하고, 교정해주고, 영향을 끼쳐가며 그렇게 각자의 어린 시절 추억으로 빠져들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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