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내어 말하기 힘든 감정들이 있다. 그 순간 그 때의 기억이 주는 여운이 있는데 도저히 표현하기 힘든 때가 있다.
박준 산문집은 이런 저런 에피소드나 산발적인 기억들이 흩뿌려져 있는 책이다. 친구 추천으로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천천히 소리내어 읽다보면 내가 겪었던 비슷한 감정이 떠오르면서, 잊고 살았던 사소한 기억들에 휩싸이게 된다.
따뜻하고 습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요즘의 날씨와 딱 어울리는 책이다. 울고싶을 정도로 따뜻한 위로가 느껴져 멈칫거리기도 했다. 한 마디로, 감성 폭발하게 만든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p.19
오래도록 마음 속에 남는 따뜻한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
그해 밤 별빛은 우리가 있던 자리를 밝힐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눈으로 들어와 빛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p.27
좋아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는 눈에 별이 박힌 것처럼 반짝거린다.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의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보게되고, 그 사람에 대한 사실을 하나라도 잊지 않으려고 모든 집중력을 총동원한다. 별 보러가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며 맺는 관계에도 어떤 정량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 정량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나는 한번에 많은 인연을 지닐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p.49
인간관계에 욕심이 많아서, 별별 대외활동을 다 찔러 넣어보고, 모든 모임에 참가하겠다고 약속도 걸어놓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즐거웠다. 그러다가 점점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커져갔고, 한 순간 힘든 관계들을 모두 놓아버릴 줄 알게 되었다.
최근 새로 만난 친구는 나와 꽤나 다른 인간관계론을 갖고 있었다. 자기 안에는 수십 가지의 성격이 비슷한 비율로 들어있고, 그래서 수십 가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친구의 폭도 수도 다양해서 그런 그 친구가 멋져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이 문장이 가슴 속에 콕 다가와 박혔다. 내가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정량은 그 친구의 것과 다르다는 생각. 친구가 많고 적음에 대한 가치판단이 더 이상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장을 하나 소개하고 싶다.
[내가 좋아지는 시간]
스스로를 마음에 들이지 않은 채 삶의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는 왜 나밖에 되지 못할까 하는 자조 섞인 물음도 자주 갖게 된다. 물론 아주 가끔, 내가 좋아지는 시간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시간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어떤 방법으로 이 시간을 불러들여야 할지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나 자신을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는 순간만은 잘 알고 있다. 가까운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때,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않을 때 좋음은 오지 않는다. 내가 남을 속였을 때도 좋음은 오지 않지만 내가 나를 기만했을 때 이것은 더욱 멀어진다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자책과 후회로 스스로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할 때, 속은 내가 속인 나를 용서할 때, 가난이나 모자람 같은 것을 꾸미지 않고 드러내되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그제야 나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p.57
커갈수록 나와의 관계가 더 중요해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나를 마음에 들어해야, 그제서야 내가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아가는 시간은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았을 때 손에 쥐고있는 것을 놓을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p.63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p.70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울음같다...라. 너무 공감되는 말이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그쳐지지 않는. 그런 마음으로 숱한 연애를 했던 것 같다. 좋아하려 해도 좋아지지 않아서 헤어지고, 나에게 안 좋을 것 같은 사람이었지만 마음을 그칠 수 없었던.
다만 사랑의 시작과 끝에는 어떤 징후들이 감지되는데 그것은 소설 속 문장처럼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내 경우에는 그것이 소리였다. 터트리는 웃음이나 나지막이 흥얼거리는 상대의 콧노래, 심지어는 마른기침 소리까지도 살갑게 느껴질 때 나는 내가 사랑에 빠졌음을 알아챈다. 반대로 상대가 가진 특유의 말투나 부르는 노래, 음식물을 씹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때 나는 이 사랑이 곧 끝을 맞이할 것이라 직감한다. p.89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p.110
한달 반, 나는 이미 실컷 놀아제끼고 있었던 상태라서 그 시간이 별로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나보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같기는 한데 이미 놀대로 다 놀아버려서 더 뭘 관광하고 먹어야할지도 모르겠던 상황. 내 취향이 별로 확고하지 않았던 22살의 나는 유럽에서 그렇게 방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고, 단비같은 며칠의 휴가를 만날 때마다 짧게 다녔던 여행들은 하루가 아쉽고 더 꽉꽉 채우고 싶은 기억들로 가득했다. 아쉬움이 남아 곱씹어보고, 순간 순간의 기억들을 애써 움켜쥐고 싶어서 눈을 감고 그 때로 돌아가기도 했다.
책 속에서 저자는 지명을 자주 언급한다. 지방의 소도시들을 자주 방문하는 것 같다. 그렇게 저자의 기억을 훑으며 나도 함께 아련한 감정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한 장 한 장 길이는 얼마 되지 않지만, 작가의 문장들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참,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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