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토크

[일상토크] 나의 세 번째 자취방, 결론은 대만족

by 파랑코끼리 2022. 12. 10.
728x90
반응형

 

성인이 된지 어언 10년이 다 돼가는데,
지방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는 청년에게
주거의 옵션은 다음과 같다.

본가에서 통학, 고시원, 자취방, 기숙사, 쉐어하우스.
더 있나..?
나는 기숙사 + 자취방 콤보를 선택한 사람이고,
지금껏 내 인생의 길목에는 세 개의 자취방이 있었다.


 

첫 번째는 대학교 4학년 시절 1년 동안.


만년 기숙사 생활을 탈출하여 진정한 성인의 자유를 누려보고 싶다는 치기어린 호기심에 시작한 자취였다.

통금이 없는 세상은 아름다웠다.
친구들과 더 찐한 우정을 나누며 술잔을 부딪힐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 무렵 친한 친구들 대부분이 같은 동네에서 자취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친구와 밤 늦게 각자의 자취방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기분은
그 시절 내가 느낄 수 있는 청춘의 행복 그 끝판왕 어딘가쯤 있었다.

방은 정말 좁아터졌고, 가끔 벌레도 나왔으며,
방 구조는 찌그러진 육각형이어서 행거를 어떻게 놓아도 공간이 남았다.
계약이 만료되기 직전 어느 여름, 폭우가 왔는데
옷장 벽쪽에 곰팡이가 펴서 죄다 세탁소에 맡겨야 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는 그런 곳에 살지 못하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저 내가 내 공간에서 요리를 해먹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일련의 행위들 자체가 다 즐거웠다.


 

두 번째는 취업 직후 4년 동안.


직주근접이 매우 중요한 가치였던 나는,
새벽 통근이 정말 자신이 없었던 나는,
걸어서 1분 거리에 회사 셔틀이 있는 곳에 방을 구했다.

이전 자취방보다 훨씬 넓어졌지만
원룸은 여전히 원룸.
잠시만 살 거라고 생각하며 짐을 최소로 간추려 생활했지만,
계약이 연장되고 또 연장되면서 어느덧 4년을 살다보니
버젓이 침대도 있고 소파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색깔로 가득찬 내 방이 되어있었다.
이 때였던 것 같다. 자취하는 나의 삶을 ‘임시로 잠시 거쳐가는 삶’이 아닌,
‘하루하루가 소중한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혼자 산다고 해서,
내 우주가 되는 공간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내게 있어 주거공간은, 삶의 만족도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오는 날 창 밖으로 보이는 대로변에 가로등 불빛이 번져있는 것을 보는 게 좋았고,
오후 출근하는 날에 문득 새벽에 눈을 뜨게 되면 눈 앞에 지나가는 셔틀을 구경하는게 좋았고,
주말 오후에는 털레털레 빨래방에서 가서 영화 한 편 때리며 이불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던 여유가 좋았고,
주방이 비교적 넓었던지라 닭, 아보카도, 수박과 같은 새로운 재료들로 요리를 해먹는 것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좋았는데,
그 방에 살 때 당시에는 낡았다느니, 관리비가 많이 나온다느니, 방이 너무 좁다느니 하며
나름의 불평거리를 찾아냈던 것 같다.

이사 나오는 날,
그래도 잊지 못할 추억들과 함께 나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품어줬던 그 방이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새로운 직장을 들어오며 또 한 번의 이사를 했다.


어릴 적부터 이사를 여러 번 해봤던지라,
짐을 싸고 푸는 것은 낯설지 않고 비교적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몸이 고된 건 사실이다.
새로운 방이 이전에 살던 곳들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서울을 벗어난 교외지역이다.
언니 부부가 미국에서 도심이 아닌 교외지역에 사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렇게 만족스럽고 여유로워보일 수가 없었다.
나도 당연히 서울이 좋다. 기회의 땅이고,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문화생활의 기회도 많고, 역동적이고, 맛집도 카페도 많다.
지하철로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나는 평일에 집과 먼 곳에서는 약속을 잘 잡지 않는 사람이고,
집에서 나와 시간을 보내며 나를 돌보는 행위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다.
좁고, 시끄럽고, 매연이 가득한 서울 한복판에서의 삶이 지쳤던지라
더욱 교외지역의 삶에 끌린 것 같다.


둘째로는, 원룸 탈출.
침실과 거실이 분리되어 있는데 세상 이렇게나 넓어보일 수가 없다.
게다가 이사오는 길에 거대한 소파도 구매했는데,
혼자 살더라도 넓은 소파에서 맘껏 뒹굴거릴 수 있으니
쉴 수 있는 공간에 다양성이 생겨서 더 양질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예전에는 음식을 하면 옷이나 침구류에 냄새가 베었고,
그걸 미처 인식하지도 못했었는데
이제는 훨씬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방이 좁아 답답하다며 틈만 나면 집 밖으로 나돌던 나였는데,
여기서만큼은 전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
내가 집순이인지 외향적인 사람인지 제대로 테스트해볼 수 있는 집이 되겠다.

일단 두 가지가 이제까지의 자취방들과 가장 큰 차이점인데,
이사 직 후 행복도가 이렇게 MAX에 가까웠던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 너무 좋아 내 방.

일단 크리스마스 느낌 나는 소파 커버부터 사러 가야지~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