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가 대단하다. 읽으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붕우유신'이라는 네 글자가 생각 안 나 '붕신'이라 말해버리는 아이가 받을 것은 오해 뿐이었다.
저자 : "천둥벌거숭이'에서 '벌거숭이'를 빼면 '천둥'이 남는데 그게 멋지다고 생각해."
친구 : "그런 말이 아니야.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너는 '천둥'보다 '벌거숭이'에 가까워서 그 단어를 뺄 수가 없어."
저자 : "근데 나는 사실 '벌거숭이'도 멋지다고 생각해. 모두가 옷을 입고 있는 세상이니까 한두 명 정도는 알몸이어도 좋잖아?"
아 나 이런 화법 왜 이렇게 재밌니 ㅋ ㅋㅋㅋㅋ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절대로 참지 않을 때마다 내 속의 가장 약한 나와 가장 강한 내가 전투적 비밀 협약을 맺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살면 가끔은 미쳤다는 평가에 노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미침을 허용하는 인간만이 타인의 광기에도 조금쯤 유연할 수 있다.
예의바르고, 착하고, 눈치보고. 그런 모습으로 살 때면 속이 답답해질때가 있다. 발을 콱 밟고 지나가거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는 여전히 예의바름을 관성적으로 지키고는 했다. 혼자 사는 성인 여성이 이방인이 드글거리는 이 도시에서 괜한 해꼬지를 당하지 않으려면 착하고 예의바른것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디폴트값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착하게 굴었던 것은, 내가 진정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쓸데없는 과도한 갈등을 피함과 동시에 어디 숨어있을지 모르는 또라이와 상종할 가능성을 최소화 시키기 위한 나만의 생존 전략이었다. 이 와중에 작가의 '스스로의 미침을 허용하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 정직하게 화를 내고, 불만을 이야기할 줄 아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힘이니까.
나 좋다는 사람 나도 좋던데... 그러다 많이 속았어요. 처음에는 나 없이 못 살겠다더니 나중엔 나 없어야 살겠다더라고요. -영화 <소년, 천국에 가다> 중에서
정신과 선생님도 "제발 신중하세요"라고 했는데, 돌이켜 보면 그 말이야말로 혹시 미치셨냐는 질문의 의학적 변주인 것 같았다.
홧김에 얼마 만나지 않은 애인과 결혼해버리려는 저자에게 의사쌤이 던진 말 ㅋㅋㅋ 혹시... 미치셨어요? ㅋㅋ
"배고프다고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외롭다고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지 않을까.
관성적인 연애로 불행해지고 싶지 않다. 근데 아직 외로우면 옆자리가 자꾸만 허전하게 느껴진다. 그 자리를 혼자서 채워나간다는건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나라는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고, 대가로서의 사랑을 벌어내는 일이 힘겨웠다. 노력해도 자꾸 외로웠기 때문에, 이제는 보상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코뿔소의 뿔처럼 그냥 힘센 사랑만을 원하게 되었다. 그러려면 사랑스러워지려는 노력보단 나 자신을 자꾸 검열하려는 습관을 치우는 노력이 필요했다.
문제를 계속 문제로 두면서 견딜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다. 집에서 내게 '어떻게 생각해?' 하고 물어주는 일기자장이 있어 괜찮았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자주 등장하는 'Dear Diary'. 일기장에게 대화를 하듯,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소상히 털어놓는 식의 나래이션이다. 초등학생 때 숙제때문에 억지로 써내던 일기는 내게 습관이 되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때까지 써내려간 일기들은 나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일기장에 별별 이야기를 다 쓰고 있다. 일기를 쓰다보면 심리 치유가 되는 기분이 든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하지 못할 이야기들, 나만 알고싶은 비밀들을 일기장은 모두 들어준다. 그걸 글자로 적어내려가다 보면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묘한 확신이 들기도 한다. 이 세상의 언어로 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이 감정과 이 상황은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준다.
아빠의 회상으로는 실제로 내가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도 한다. "이왕 낳았으면 웃으면서 키워...."
ㅋㅋㅋㅋㅋ아빠한테 이런말 하는게 너무 웃기다ㅋㅋㅋㅋ
때로 가족이란 세상에서 가장 가까워야만 하는 사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시 실제 거리보다는 거리를 벌릴 줄 아는 능력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서로를 미지의 세계로 두어야 미지를 탐구하고픈 열망이 식지 않고, 짐작보다는 질문을 나누며 오손도손 해답을 찾아갈 수 있다.
이 말에 격하게 동의한다. 부모든, 형제든, 배우자든, 우리는 그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그들을 잘 안다는 착각에 더 깊숙히 빠져든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경계하고 싶다. '우리 부모님은 보나마나 반대할거야'가 아닌,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관계. 어릴 때보다는 성인이 되어서 가족들과의 대화가 훨씬 더 많아진 것 같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를 아직 잘 모르고, 더 많이 알아갈 필요가 있으니까.
검열 없이 펼쳐지는 쾌락은 가진 자극을 소진하고도 고갈 상태를 속인다. ... 따라서 지나친 쾌락 추구는 능동적인 형태의 자포자기이기도 했다. 나 역시 매일매일 주정뱅이나 누군가의 애인이 됨으로써 오롯이 내 자신이 되어보는 비극을 방어하는 중이었다.
'오롯이 내 자신이 되어보는 비극'이라니. 이해가 된다. 누구의 무엇도 아닌, 독립된 개체로서의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우리는 무한한 자극의 시대에 살고있다. 유투브와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 애플티비... (제발그만) 쏟아지는 콘텐츠, 자극적인 연애 프로그램,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음식점과 카페, 술, 술, 술. 넘치고 넘쳐 범람하는 쾌락의 홍수 속에서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쾌락을 접할수록 역치가 올라가고, 투입시간 대비 얻는 행복은 하락한다. 실상은 퇴근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영상만 돌려보는 것 같지만, 그게 쉬는 거라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능동적인 형태의 자포자기'가 맞는 것 같다. 나와 더 많은 대화를 하며 내가 정말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은 너무나 중요하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집에 혼자 있을 수 없기에 생겨난다." 뒤집으면 "집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인간은 행복해질 것이다"가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인정한다. 내가 주변과의 긴밀한 연결감을 통해 내 자신의 선명함을 확인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러나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실제로 나갈 필요가 없음을 안다.
공자가 말하길 30세란 곧 '이립(而立)'이었다. 마음이 확고하여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이.
자기확신과 겸손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 부끄러운 일은 줄이고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안겨줄만한 말과 행동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잘해나갈 수 있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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