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하면서 점점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중, 이 책이 눈에 딱 꽂혔다.
'이거다'
에세이인줄 알고 집어들었던 <일의 기쁨과 슬픔>은 사실 소설책이다.
다 읽고나니 에세이 못지 않게 한국 현대사회의 젊은 세대가 일하면서 겪는 미묘한 감정선을 잘 그려낸 책이라고 생각된다.
총 8개의 단편 소설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흡입력이 엄청나다.
모두 20-30대의 사회생활을 겪고 있는 직장인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읽다보면 묘하게 슬퍼지면서도 공감이 되는 아린 기분이 든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걸까.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고, 일로 묶인 사람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지 못하고.
첫번째 이야기, <잘 살겠습니다>
결혼 청첩장을 돌리는 주인공의 이야기.
'이걸 왜 나한테 줘?' 라는 식의 눈빛을 받기 두려워 최대한 보수적으로 가까운 사람에게만 청첩장을 돌리기로 한다.
얄미운 동기 '빛나언니'는 3년간 연락 한 번 없다가, 본인 결혼정보를 얻기 위해 주인공에게 친한 척 하며 먼저 연락해온다.
주인공의 시간과 돈과 정보를 다 빼가고나선 축의금조차 내지 않은 빛나언니에게 주인공은 화가 난다.
그러다가, 미숙한 신입사원 시절 빛나언니가 저질렀던 실수를 회상하며,
그 실수를 빛나언니가 저질러주지 않았다면 자기가 실수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도 든다.
청첩장 받는 입장으로서, 나라고 그런 생각이 안 들었던 건 아니다.
가까운 사람이 결혼한다고 하면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줄 일이다.
허나 친하지도 가깝지도 앞으로 더 볼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이 청첩장을, 그것도 모바일로 던져줄 때는 솔직히 좀 귀찮았던 것 같다. 나는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청첩장 줄 사람을 정하는 것이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요하는 작업일 것은 분명하다.
더불어 주인공처럼 머릿 속으로 돈 계산도 하게 된다.
'5만원 짜리 관계', '10만원 짜리 관계'.
축의금이라는 개념은 결혼 당사자에게도, 축의금을 내는 사람에게도,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돈으로 치환하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이런 일련의 생각의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 속물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하나씩 관계가 정리되어 가는 거구나 싶어 씁쓸하다.
"빛나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 이천원을 내면 만 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p.28"
너무 슬픈 문장 아닌가. 동시에 저런 느낌을 나도 알고 있다는 부분에서 더 설움이 몰려왔다.
빛나언니는 친구도 아니고, 언니같이 든든한 존재도 아니다.
그렇다고 동기애로 똘똘 뭉쳤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단순히 직장동료라고 보기에는 애증같은 감정이 뭉쳐있고, 참 애매하다.
그래서 주인공은 빛나언니와 주고받는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다.
둘은 서로 축의금을 주고 받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은 빛나언니로부터 답례떡을 받게 된다.
그렇게 빛나언니를 향한 마음의 잔고는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전환하게 된다.
별로 훈훈한 엔딩은 아닌 듯 싶기도 하다.
두번째 이야기, <일의 기쁨과 슬픔>
현실판 당근마켓에서 일하는 안나의 이야기다.
나름 중고마켓인 당근마켓에 새 물건을 도배하다시피 올리는
아이디 '거북이알' 님을 만나서 자제시키라는 지령을 받은 안나는 그녀를 실물로 영접한다.
알고보니, 그녀는 회사에서 회장의 심기를 잘못 건드려 다른 팀으로 발령 및 승진 취소, 그리고
1년간 월급을 복지포인트로 받아야 하는 신세.
그 포인트로 물건을 사서 판매하며 현금으로 바꾸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p.50
굴욕감에 침잠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p.51
"전 퇴근하고 나면 회사 생각을 안 하게 되더라고요."
"나도 그래요. 사무실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 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 p.56
정상이 아니다 싶은 일도 많이 벌어지고, 효율적인 것만을 추구하며 인간성을 놓치기 십상이고, 부당하며 이건 아니다 싶은데 주변 모든 사람들이 한 마디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게 맞는가보다 하고 살아가는 세상.
그게 회사라는 공간이 아닌가 싶다.
모든 사람은 결국에는 이중인격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자기 본래의 성격을 부정당하고 평가받으면서 그렇게 회사에 맞는 사람으로 깎아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을 프로페셔널리즘이라고 말하지만, 글쎄. 괜찮아하는 책 속 주인공의 모습이 왜 그렇게 서럽게 보일까.
나도 집에 들어오면 그냥 모든 것으로부터 셧다운하고 전혀 다른 것에 관심을 집중하며 휴식을 취하는 편이다.
특히 요즘 들어 핸드폰 포비아가 쎄게 왔다. 전화벨 소리만 울리면 움찔거리고, 전화받기가 무서워하고.
진동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만 같다. 메신저는 재깍 확인하고 싶지가 않다.
우울하고 심오한 영화도 즐겨보던 나였는데, 이제는 마냥 즐겁고 유쾌한 영화만을 찾는다. 가볍고 그러면서도 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만한 상큼한 영화들.
하루 종일 모니터만 보고 있다보니, 퇴근 후에는 종이를 더 찾게 된다. 내가 기계를 쓰고 있는건지, 내가 기계가 되어가고 있는건지. 그런 순간들이 종종 찾아온다.
마지막 이야기, <탐페레 공항>
아일랜드로 워킹 홀리데이로 떠나던 길, 주인공은 핀란드 탐페레 공항에서 잠시 경유한다.
그리고 한 핀란드 노인을 만난다. 4시간 남짓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왕년에 사진작가였던 그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그 노인은 주인공의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고 그 사진을 한국의 주소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3개월의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집에 도착해있는 사진과 엽서를 발견한다.
'답장해야지' 생각했지만, PD 취업 준비에 바쁜 나날이 이어지고, 하루 이틀 미루다가 결국 영영 미뤄버리고 만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노인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숨가쁘게 흘러가는 나날들 중 단 한 순간이라도 빼서 답장을 할 여유가 없는 주인공이다.
그리고 현실과 타협하여 PD와는 거리가 먼 한 회사에서 6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노인이 보낸 편지를 서랍에서 우연히 발견한다. 그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두꺼운 종이가 사진 뒤에 붙어있었다.
"Do Not Bend (구부리지 마시오)"라는 노인의 손글씨가 쓰여있다.
스쳐 지나갔을 뿐인 타지에 사는 익명의 타인을 위해 정성들여 사진을 부쳤을 눈이 잘 안 보이는 노인의 마음에 주인공은 눈물을 흘린다.
말 그대로 노파심이라는 게 이런 걸까. 사진이 지구 반대편 먼 길을 거쳐가는동안 행여나 구겨질까, 노인은 많이 걱정했던 것 같다. 나는 시리얼 상자를 가위로 자르고, 그것을 풀로 사진의 뒷면에 단단히 붙이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 가위와 풀과 사진 그리고 편지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더듬거리는 노인의 쭈글쭈글한 손을.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p.211
어떤 마음은 두고두고 미뤄뒀다가는 영영 전하지 못할수도 있음을.
우리가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일 수 있음을.
늦었다고 생각될 때라도, 그 마음을 한 번 열어보임이 어떠냐고, 책의 마지막 장은 말하고 있다.
점점 삭막해져가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인간성을 톡 건드리는 책이다.
낯선 사람을 과하게 경계하고, 돈으로 얽힌 관계라고만 규정하며 정을 주지 않으려 하고,
나와는 관계 없는 사람이다 하며 애써 무시하고 지나가고.
사회를 살아가며 매일같이 소모되는 감정을 애써 지키려고 발버둥치다 보니,
어느새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씁쓸한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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